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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CTS
작성일시 : 2010-06-11
조회 :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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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TS가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준비한 금요 기독인물 연속보도. 오늘은 근대 여성 교육 선구자이며, 독립운동가였던 김마리아 선생을 소개합니다. 53년 짧은 생이지만, 독립운동과 교육에 일평생을 바쳤던 김마리아 선생의 삶을 송주열 기자가 전합니다. --------------------------------------------- 김마리아 선생은 1891년 한국 최초 교회가 세워진 황해도 장연군 소래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자 한학자였던 아버지 김윤방의 영향으로 선생은 일찌기 신앙과 교육에 눈을 뜨게 됩니다. 12살이 채 되지 않아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잃게 된 선생은 애국지사들의 출입이 잦았던 숙부 김필순의 집에서 공부를 하며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의 현실을 알게 됩니다. 그녀가 독립운동가로서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1915년 동경여자대학 유학길에 오르면서 부텁니다. 1919년 일본 유학생 중심의 독립선언인 2.8선언에 참여해 연행됩니다. 이후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한 김마리아 선생은 졸업을 포기하고, 귀국 기독인재 양성을 시작합니다. INT 이연옥 이사장 / 김마리아 기념사업회 정신여학교 교사 시절 3.1운동에 여성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주도하기도 했습니다. 3.1운동 가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가혹한 옥고를 치른 김마리아 선생은 출소 후 오히려 더욱 조직적인 여성운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INT 박용옥 교수 / 前 성신여대 사학과 그러나 가혹해진 일제의 탄압은 선생으로 하여금 1921년 중국 망명길에 오르게 합니다. 상해 임시정부 국민대표회의 애국부인회 자격으로 활동 하던 그녀는 임시정부 운영을 놓고 분열하는 모습을 보고, 1923년 돌연 미국으로 제2의 망명길에 오릅니다. 이때부터 김마리아 선생은 독립운동의 무게를 정치보다는 교육에 두게 됩니다. 1931년 고국으로 복귀한 선생은 마르타윌슨 여자신학원 교수로 부임. 요한계시록 강의로 민족의 희망을 전했습니다. 또, 농촌계몽운동, 4년 동안 여전도회활동을 하면서 전국적인 여성운동을 전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일제의 치밀한 탄압으로 쇠약해질대로 쇠약해진 김마리아 선생은 1943년 마르타윌슨신학원이 폐교와 함께 이듬해 운명을 달리하게 됩니다. INT 배학복 (97세) / 김마리아 수양딸 마리아 선생 돌아가실 때에 어렵게 돌아가셨어요. (선생이) 엎드려져 있는 것을 바로 일으켜 세우면 서 계시질 못했어요. 참 매도 많이 맞으시고, 그렇게 못 되게 굴더라구....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대한독립과 결혼한 열사로, 여성 교육의 선각자로 빛과 소금처럼 살다간 김마리아 선생의 애국정신을 되새겨봅니다. CTS 송주열입니다. DVE 애국열사 ‘김마리아’ 아버지 영향 신앙·교육 눈 떠 애국지사 보며 조국 현실 알아 1919년 2.8독립선언 가담 귀국 후 기독 인재 양성 INT 이연옥 이사장 / 김마리아 기념사업회 출소 후 더 강력한 여성운동 INT 박용옥 교수 / 前 성신여대 사학과 탄압 피해 1921년 중국 망명 미국 망명 후 교육에 집중 1931년 귀국 신학으로 희망 전해 4년간 여전도회 전국운동 전개 1944년 신학원 폐교 후 소천 INT 배학복 (97세) / 김마리아 수양딸 마리아 선생 돌아가실 때에 어렵게 돌아가셨어요. (선생이) 엎드려져 있는 것을 바로 일으켜 세우면 서 계시질 못했어요. 참 매도 많이 맞으시고, 그렇게 못 되게 굴더라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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